【홍성골목상권을 가다-5】“광천에 가서 돈 있는 체 하지 말라”던 옛 옹암포구 골목상권
【홍성골목상권을 가다-5】“광천에 가서 돈 있는 체 하지 말라”던 옛 옹암포구 골목상권
  • 이은주 기자
  • 승인 2021.05.1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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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 폐항후 토굴숙성새우젓으로 명성 되찾아...지역경제활력
새우젓 특화음식개발 필요, 뱃길복원위해 정치권에서 나서야
광천 옹암포구의 옛 모습
광천 옹암포구의 옛 모습

“옹암포구가 가장 번성하던 시기, 금광에서 닷새 일하면 쌀 한말이 생기고 이틀동안 물건 나르면 열흘은 거뜬히 먹고 살 정도로 일거리와 돈이 넘쳐나는 곳이었지. 오죽하면 광천 독배에 가서 돈 자랑 하지 말라고 했겄어. 320여세대에 방 한칸씩 얻어 살 정도였으니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발 디딜틈이 없었지. 장사치들을 위한 여인숙이 수두룩했고 병원에 이발소까지 없는 것이 없는 곳이었지.“

현재 광천읍 옹암리에서 새우젓 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김정만(78세)씨가 회상하는 70여년전 옹암리 골목상권의 추억이다.

광천읍지에 따르면 광천읍의 남쪽 끝에 위치해 보령시와 경계를 이루는 옹암리는 독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독배, 독바위라고도 불리었다.

옹암포구는 일제강점기까지도 크게 번성한 충남의 가장 큰 시장의 관문이었던 곳으로 4일과 9일 장날에는 150여척의 어선과 장배가 드나들며 크게 번영을 누렸던 포구였다.

안면도와 서해안 일대의 섬에서 채집한 해산물을 실은 배가 광천장날 무렵이 되면 옹암포구로 밀려드는 모습이 장관을 이뤘다.

포구 주변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온갖 장사치가 몰려들었다. 배를 타고 온 섬 사람들을 상대로 음식점과 여관, 주막이 성업을 했는데 1970년대 중반에 부두가 오천으로 옮겨간 후에도 여전히 이 지역의 상업지구를 찾아 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류의 집산지였던 탓에 운수업도 성행해 1950~1960년대에 뱃짐을 부리는 노동 조합원을 비롯해 화물차와 리어카, 지게 등을 이용한 운반업이 성황을 이뤘다.

특히 장날이면 봇짐장사와 행상들이 몰려와 싼값에 물건을 사들여 다른 지역으로 가져다 팔았는데 일찍이 원홍주등육군상무사의 임소가 옹암에 있었다.

1931년 장항선의 개통으로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더욱 번성했던 옹암포의 전성기는 1970년까지 이어지고 점차 시들해졌다. 1960년대부터 선착장 위쪽에서부터 흙이 흘러내려왔고 계획적인 매립도 함께해 옹암포구는 폐항되었다.

옹암포구의 전성기가 끝나면서 포구 관련 상업도 크게 쇠퇴했다. 그 과정에서 인구도 줄고 주민들의 삶의 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구가 폐쇄되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가운데 마을 뒷산인 당산의 폐광 시설을 활용한 토굴 새우젓의 생산과 판매가 성공을 거두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광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토굴새우젓은 신안 앞바다에서 잡힌 질 좋은 새우젓에 1년간 간수를 뺀 천일염으로 간을 맞춰 적당한 습도와 자연해풍, 일년 내내 13~15°C의 일정한 온도와 습도 85% 이상을 유지하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활석암반토굴속에서 3개월간 숙성시켜 탄생된다.”며 “토굴에서 숙성이 잘된 새우젓은 단맛이 나고 살이 단단하며 젓국물이 희고 맑다. 또한, 비타민, 미네랄 같은 영양소가 농축된 무공해 자연식품으로 인정받았다.
토굴새우젓은 신안 앞바다에서 잡힌 질 좋은 새우젓에 1년간 간수를 뺀 천일염으로 간을 맞춰 적당한 습도와 자연해풍, 일년 내내 13~15°C의 일정한 온도와 습도 85% 이상을 유지하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활석암반토굴속에서 3개월간 숙성시켜 탄생된다.”며 “토굴에서 숙성이 잘된 새우젓은 단맛이 나고 살이 단단하며 젓국물이 희고 맑다. 또한, 비타민, 미네랄 같은 영양소가 농축된 무공해 자연식품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옹암리에는 40여개의 토굴 중 26개 토굴에서 새우젓을 숙성중이다. 고령화로 인해 광천토굴새우젓을 판매하고 있는 업체 대표의 평균연령이 60대로 지속적으로 이어갈 후계자 양성과 새우젓을 활용한 차별화된 메뉴개발 역시 시급하다.
현재 옹암리에는 40여개의 토굴 중 26개 토굴에서 새우젓을 숙성중이다. 고령화로 인해 광천토굴새우젓을 판매하고 있는 업체 대표의 평균연령이 60대로 지속적으로 이어갈 후계자 양성과 새우젓을 활용한 차별화된 메뉴개발 역시 시급하다.

노동마을에 살았던 고(故) 윤병원씨가 1954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금광 폐광에 팔고 남은 새우젓을 보관했다가 한여름이 지나도 생생하고 잘 숙성된 새우젓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이 토굴 새우젓의 시작이다.

김정만 씨는 “당시 윤병원씨가 새우젓이 담긴 독을 사람을 사서 폐광에 넣었는데 여름 지나고 가을에 열어보니 상하지도 않고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 다음 해에 다시 한번 넣어보니 새우젓 맛이 깊고 빛깔도 좋았다.”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토굴의 효험이 알려지면서 전국의 새우젓을 옹암리 토굴에서 숙성할 만큼 소문이 나면서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라고 전했다.

광천토굴새우젓 홍보전시관 고묘금 관장은 “토굴새우젓은 신안 앞바다에서 잡힌 질 좋은 새우젓에 1년간 간수를 뺀 천일염으로 간을 맞춰 적당한 습도와 자연해풍, 일년 내내 13~15°C의 일정한 온도와 습도 85% 이상을 유지하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활석암반토굴속에서 3개월간 숙성시켜 탄생된다.”며 “토굴에서 숙성이 잘된 새우젓은 단맛이 나고 살이 단단하며 젓국물이 희고 맑다. 또한, 비타민, 미네랄 같은 영양소가 농축된 무공해 자연식품으로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옹암리가 포구시절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뱃길복원과 토굴을 정책적으로 보존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데 주민들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31년 장항선의 개통으로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더욱 번성했던 옹암포의 전성기는 1970년까지 이어지고 점차 시들해졌다. 1960년대부터 선착장 위쪽에서부터 흙이 흘러내려왔고 계획적인 매립도 함께해 옹암포구는 폐항되었다.
1931년 장항선의 개통으로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더욱 번성했던 옹암포의 전성기는 1970년까지 이어지고 점차 시들해졌다. 1960년대부터 선착장 위쪽에서부터 흙이 흘러내려왔고 계획적인 매립도 함께해 옹암포구는 폐항되었다.

김정문 전 홍성군의원은 “옹암리는 갯벌이라는 천연자원을 잃어버린지 수십년이다. 모두가 포구를 복원해 옛 명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물이 없는데 포구가 어떻게 형성되겠느냐”며 “20여년전부터 홍문표 의원은 ‘옹암리 뱃길을 복원해야한다’, ‘광천이 살아야 홍성이 산다’는 주장을 수없이 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역시 홍성·보령호 역간척 사업을 반드시 추진하겠다고 주장해 옹암리 주민들이 기대가 컸다. 하지만, 삽질한번 못해보고 현재 아무것도 이뤄진 것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농어촌공사에서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수년간 염기를 빼기위한 노력을 해왔는데 과연, 다시 갯물을 담으려고 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뱃길복원(역간척사업)은 주민들과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치권에서 적극 나서서 국가정책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당장에 소요되는 예산에 대해 낭비라 생각하지 말고 후대를 위해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현재 옹암리에는 40여개의 토굴 중 26개 토굴에서 새우젓을 숙성중이다. 고령화로 인해 광천토굴새우젓을 판매하고 있는 업체 대표의 평균연령이 60대로 지속적으로 이어갈 후계자 양성과 새우젓을 활용한 차별화된 메뉴개발 역시 시급하다.

김 전 의원은 “토굴이 옹암리 뿐만 아니라 홍성군의 보배로운 자산인 것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동안 발전시키기 위한 논의와 군 정책은 찾아볼 수가 없다.”며 “지역경제의 동력이 되고 있는 토굴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김정만 씨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김치를 사먹는다. 그러다보니 새우젓의 판매가 줄고 있다.”며 “새우젓을 활용한 차별화된 음식을 개발하고 토굴새우젓을 이어갈 수 있는 방안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옹리 최봉수 이장은 “폐교된 광남초를 주민과 새우젓을 사러오는 도시민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간 개발 등 다각적인 방안을 구상중이다.”라며 “또한, 옹암리 당산에서 지내고 있는 당제를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해 옛 옹암포구의 명성을 되찾고자 한다.”고 말했다.

옹암 당제는 옹암포구가 번성하던 시절에 바닷일을 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던 제의였다. 옹암포구의 경제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때에는 당제의 규모또한 대단해서 당제가 시작되면 여러 날 동안 계속될 정도였다.

김 전 의원은 “광남초등학교는 50여년전 옹암리에 수백명의 초등학생 있던 시절, 내 아버지들이 내 자식들 추운날 멀리 학교 다니는 것이 싫어서 논을 기증하고 바다에서 모래를 퍼날라 운동장을 만드는 등을 통해 설립된 학교이다.“라며 ”지금은 교육청 소유가 되었지만 예전 아버지들의 숭고한 정신과 거룩한 뜻이 묻혀버린 채 방치되고 있다. 주민들에게 다시 되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옹암포구에 대해 설명해주는 김정만씨와 상옹리 최봉수 이장 모습
옛 옹암포구에 대해 설명해주는 김정만씨와 상옹리 최봉수 이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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